[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한 그루 단풍나무가 되어
한 그루 단풍나무가 되어 나는 언덕을 오르고 있다 새가 물어주는 열매를 입에 물고 언덕을 오르고 있다 가을에 만났으니 가을만 생각하자던 농담이 아파 가장 가까이 너를 볼 수 있는 언덕을 오르고 있다 나를 반기는 단풍나무 곁에 앉아 붉게 타오르는 단풍나무가 되고 싶었다 움직이지 않아도, 노래하지 않아도 침묵과 부동이 어색하지 않은 나는 한 그루 단풍나무가 되고 싶었다 앙상한 가지, 차갑게 부는 겨울을 부둥켜 안고 마지막 떨어져 버릴 이파리를 모아 기도하는 너의 마르고 긴 손을 부비고 싶었다 맑은 수액, 속으로 속으로 핏줄같이 흐르는 소리 소란한 세상이 싫어, 숨과 숨으로만 살아 나는 보이지 않는 땅 속으로 뿌리 내리는 한 그루 단풍나무가 되고 싶었다 세상이 말하는 힘은 힘이 아니다 뿌리와 뿌리를 이어가는 불거진 핏줄 겨울을 견디어 봄을 당겨 오는 뜨거운 힘 나는 뜨거운 단풍나무가 되고 싶었다 네가 건네준 푸르고 붉은 목도리 두르고 샤갈의 푸른 밤을 날아 한없이 네게 가고 있다 숨과 숨으로만 만날 수 있는 한 밤 중 수 천, 수 만리 깊은 잠 깨워 네게 가고 있다 가파른 언덕 길, 생의 한 모퉁이에서 나는 한 그루 단풍나무가 되어 잠든 당신 창가로 가고 있다 시카고 늦가을은 을씨년스럽다. 몇 일 간 잿빛 하늘이었다. 아마도 전혜린이 살고 있던 독일 뮌헨 루트비히의 날씨가 이러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겨울을 앞둔 늦가을 어김없이 찾아오는 열병. 간간히 안개로 뒤덮인 새벽 언덕은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잠 재우는 묘한 매력이 있다. 언덕을 오르다 보면 멀리 동이 트고 옷 벗은 나무들은 잔 가지를 흔드는데 안개는 가지가지 사이를 매만지며 나무를 사랑한다. 어쩌면 오늘도 그 사랑으로 나무는 제 몸을 견뎌내는지 모르겠다. 고등학교 때 탐닉했던 전혜린의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의 책장을 넘기며 나는 언덕을 오르고 있다. 여기저기 새소리가 들려온다. 반가운 까치가 물어다 준 빨간 열매를 잎에 물고 나는 맑은 수액이 흐르는 나무 숲으로 가고 있다. 쌀쌀해진 언덕은 갈대 부딪치는 소리로 가득하다. 훨훨 타오르다 남겨진 주황색 나뭇잎들은 언덕의 그늘진 틈새를 메우며 쌓여있다. 저 멀리 나를 반기는 단풍나무 한 구루 붉게 타오르는데, 숨과 숨이 만나는 곳, 뿌리와 뿌리로 이어지는 이곳은 우리들만의 세상이었다. 떨어진 단풍 입을 주워 들었다. 아직도 촉촉하게 살아 있었다. 안개는 서서히 거쳐 가고, 제 몸을 드러낸 나무들은 가지와 가지를 부딪치며 서로를 위로하고 있었다. 움직이지 않아도 노래하지 않아도 나는 나무 깊은 뿌리로부터 강한 힘으로 오르는 수액의 흐름을 느낄 수 있다. 죽은 듯 보이지만 결코 죽지 않아, 모든 것을 아래로 아래로 떨구어내 마침내 벌거숭이가 된 나무들. 여전히 봄으로 얽히고 뻗어가는 가지들. 보이는 것으로만 살아왔던 부끄러운 나를 책하며, 보이지 않는 땅속 깊이 뿌리 내리는 나무가 되고 싶다. 부르고 싶은 이름을 목놓아 부르다 붉게 멍든 한 그루 단풍나무가 되고 싶다. 이 언덕 나무 숲은 나의 쿼렌시아. 이곳에 오면 숨과 숨으로 살아가는 나무를 배운다. 나도 숨으로 그들에게 다가 갈 수 있다면, 깊은 호흡으로 나무들을 안을 수 있다면 나무는 깊고 깊은 흐르는 물소리를 내게 들려 주겠지. 독일 뮌헨 전혜린이 살고 있던 그 언덕에도 붉게 단풍이 들었었겠지? 떨어지는 낙엽들을 바라 보며 깊은 숨을 내쉬었겠지? 호흡이 살아있는 동안 그녀의 마음을 빼앗아버린 고통과 사유, 그 날카로운 칼 끝마다 꽃으로 피어 그녀의 몸 구석 구석을 흐르고 있었겠지. 나무 속 세포마다 소리내 흐르는 강물, 결코 고개 숙이지 않는 끈질긴 생명, 너의 깊은 들숨과 날숨. 샤갈의 푸른 밤을 날아 나는 잠든 그대 창가로 날아 가고 있다. (시인, 화가) 신호철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단풍나무 언덕 나무 새벽 언덕 시카고 늦가을